거실 시계는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고, 창밖 가로등은 비는지 아닌지 모를 습기를 뿜어낸다. 휴대전화 화면을 올려도 새 소식은 없다. 이런 외로운밤에 사람은 질문을 거듭한다. 지금 이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대화창에 짧은 메시지를 남기자니 금세 사라질 것 같고, 전화는 상대의 일상을 거칠게 흔들 것 같다. 그럴 때 탁자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펜을 쥐어보면, 이상하게도 온기가 손끝으로 번진다. 문장을 뱉어내는 대신 천천히 꾹꾹 눌러 적는 행위가, 마음의 굴곡을 따라가며 다독인다. 손편지는 그렇게, 어둠이 가장 짙을 때 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는 방식이 된다. 손글씨가 주는 감각의 층위 손편지는 종이의 질감, 잉크의 농담, 글씨의 속도 같은 여러 층위를 한 장 안에 겹쳐 둔다. 표준화된 폰트는 깔끔하고 효율적이지만, 손글씨는 작자의 컨디션과 성정이 스며든다. 한 획이 조금 떨렸다면 그날의 피로가, 예상보다 큰 마침표는 말하고 싶은 것을
겨울의 밤은 도시를 얇게 감싸는 유리컵 같다. 소리가 둔하고 빛이 고요하게 번지며, 사람의 발자국이 하루의 끝을 정리하듯 또렷하게 남는다. 외로운밤에 방 안 공기는 더 무겁게 느껴지고, 스마트폰의 불빛은 오히려 마음을 더 좁게 만든다. 이럴 때 문을 열고 겨울밤으로 나가 한 걸음씩 옮겨 보자. 줄어든 소음과 차가운 공기, 적당한 어둠은 생각의 가장자리를 다듬는다. 길 위에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숨을 잘 쉬고 있는지, 내 발이 얼마만큼 땅을 믿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몇 해 전, 첫눈이 내린 날 밤 10시의 골목에서 나는 30분쯤 걸었다. 발끝에 눈이 달라붙는 소리와 가로등 아래 떠다니는 입김, 공원 가장자리의 민들레씨처럼 흩어지는 사람의 발자취.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추위보다 몸에 깃든 차분함이 먼저 느껴졌다. 외로운밤이 꼭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선명한 윤곽을 얻은 외로움은 다루기 쉬워진다. 겨울
밤은 늘 조용하지 않다. 도시의 불빛은 바닥에서 천천히 기어오르고,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낮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를 마치 속삭임처럼 실어 보낸다. 그 사이에 우리는 앉아 있다. 말하지 않았던 말들, 꾹꾹 눌러 담아 두었던 마음, 어쩌면 한 번도 온전히 들여다보지 못한 감정들과 함께. 외로운밤은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낮에는 온전히 몰두하지 못했던 생각이 위로 올라오고, 문장으로는 붙들기 힘든 감정들이 진득해진다.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타이핑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말들이 손끝으로 바짝 다가온다. 거실 시계를 봤을 때가 2시 17분이었다. 램프를 하나 켜고, 오래전에 선물 받았던 연습장 첫 장을 찢어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적어도 이 종이는 나를 오해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나는 이름을 쓰는 것으로 시작했다. 부르는 호칭은 더 어렵다. 성을 빼면 너무 가까운 것 같고, 풀네임은 멀다. 그 사이 어딘가에
밤 11시 이후의 손가락은 생각보다 영리하다. 무의식적으로 같은 앱을 여닫고, 낯선 이름의 영상을 눌러 보다가, 새벽 1시를 지나면 어떤 알림이든 이유를 대며 더 머무른다. 몸은 피곤한데 눈은 말짱하고, 마음 한켠은 더 외로워진다. 외로운밤과 스마트폰은 서로를 키운다. 적막이 두려워 화면에 기대고, 화면은 더 선명한 적막을 반사한다. 이 글은 그 고리를 느슨하게 하는 실험에 가깝다. 금욕이 목표가 아니다. 숨을 고르며, 잠자리에 사람이 먼저 가고 기계는 뒤따르게 만드는 기술을 이야기한다. 외로움과 화면, 무엇이 먼저였을까 사람마다 트리거는 다르다. 어떤 사람은 퇴근길 택시에서, 어떤 사람은 불을 끄고 누운 순간에,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신 날 유독 화면과 접착된다. 내 경우는 새벽 작업을 마치고 침대로 옮길 때였다. 이메일 답장을 두어 개 보내고, 간단히 뉴스를 보겠다고 시작해도 30분 안에 멈춘 적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간단히 끝낼